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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종묘의 역사문화환경: 국가유산청의 행정명령이 던진 화두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지난 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앞 세운4구역 재개발과 관련하여 세계유산영향평가(HIA) 이행을 촉구하는 행정명령을 발송했다고 밝혔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시와 SH공사 등에 영향평가 완료 전까지 사업시행인가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며, 평가 결과에 따른 높이 조정 등 유연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대화 창구가 닫힌 점에 유감을 표했습니다. 아울러 태릉CC 등 다른 유산 인근 개발 사례를 언급하며 보존과 개발의 균형을 위한 절차적 정당성을 강조했습니다.
1. 닫혀버린 대화의 창: 국가유산청이 행정 조치에 나선 배경
대한민국의 심장부이자 유네스코가 인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지닌 종묘가 거대한 개발 압력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그간 서울시장 및 관계 지자체장들과의 비공식 회동을 통해 상생의 길을 모색해왔으나, 최근 종로구와 서울시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 행보에 결국 강력한 행정명령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세계유산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영향평가를 거치라는 최후통첩입니다. 대화 창구가 닫힌 상황에서 국가유산의 파수꾼으로서 법적 권한을 행사한 고심 어린 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세계유산영향평가(HIA)의 본질: 규제가 아닌 조율의 도구
많은 이들이 세계유산영향평가를 개발을 가로막는 '대못'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허 청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HIA가 결코 개발 저지용 제도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이미 2018년 협의된 71.9m라는 높이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평가 결과에 따라 유연한 조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즉, 영향평가는 해당 개발 사업이 세계유산의 조망권과 역사적 맥락에 어떠한 구체적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의 밀도와 유산의 품격을 공존시키는 최적점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생략한 채 강행되는 개발은 향후 국제사회에서의 신뢰 실추라는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습니다.
3. 태릉CC와의 극명한 대비: 절차적 이행이 가져오는 신속성
허 청장은 현재 진행 중인 태릉골프장 부지 주택 공급 계획을 세운4구역의 반면교사로 제시했습니다. 태릉CC의 경우 국토부 및 LH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영향평가 절차를 차질 없이 밟고 있으며, 올해 안에 평가가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만약 세운4구역 또한 지난해 재정비촉진계획 고시 직후 영향평가 절차에 착수했다면 이미 갈등은 봉합되고 사업은 궤도에 올랐을 것이라는 지적은 뼈아픕니다. 지자체의 행정 편의주의적 접근이 오히려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을 늦추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민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4. 부산 세계유산위원회를 향한 우려: 국제적 불상사를 막아야
올해 7월 부산에서 개최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문화유산 관리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무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묘 앞 고층 개발을 둘러싼 논란이 공식 의제로 상정되어 국제적인 우려를 사는 것은 국가적 망신이 될 수 있습니다. 허 청장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언급한 것은, 국제기구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국가라는 낙인이 찍힐 경우 향후 '한양의 수도성곽' 등 새로운 유산 등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세계유산은 한 지역의 자산이기 이전에 인류 공동의 유산이며, 그에 걸맞은 책임감 있는 관리가 요구됩니다.
5. 보존과 개발의 황금분할: 미래지향적 국가유산 행정의 과제
국가유산청의 이번 행정명령은 우리 사회에 '어떠한 도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유산은 현재의 삶을 옥죄는 족쇄가 아니라, 도시의 매력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핵심 동력입니다. 수도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재건축 현장에서 국가유산청이 지향해야 할 바는 무조건적인 현상 유지도, 무분별한 개발 허용도 아닙니다. 과학적인 영향평가와 다자간 협의체 활성화를 통해 개발 이익과 역사적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균형'입니다. 세운4구역 사태가 단순한 대립을 넘어, 대한민국이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거듭나는 행정적 성숙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매력은 과거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세운4구역의 성공적인 재탄생은 단순히 건물을 높이 올리는 것에 있지 않고, 종묘라는 거대한 시간의 숲과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의 행정명령이 갈등의 심화가 아닌, 멈춰버린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도출하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6년의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수백 년 후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