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대표적 야당 지도자였던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80세)가 15일(현지시간) 인도 여행 중 심장마비로 별세하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딩가 전 총리는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료진의 거듭된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은 오딩가 전 총리의 장례를 '국장'으로 엄수할 것을 선포하고,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지정했습니다. 루토 대통령은 오딩가 전 총리를 향해 "케냐 최고의 정치가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아들 중 하나"이며, "민주주의의 거인이자 두려움 없고 지칠 줄 모르는 자유 투사였다"고 극찬하며 추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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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민주주의의 거인 서거: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 심장마비로 별세 및 국장 엄수 선포
"케냐 최고의 정치가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아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거인이자 두려움 없고 지칠 줄 모르는 자유 투사였습니다."
독일 유학과 反체제 투쟁: 격동적 정치 입문기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는 1963년 케냐 독립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자라모기 오깅가 오딩가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정치 명망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독일(당시 동독)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나이로비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회사를 설립하는 등 학자이자 사업가로서의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의 정치적 여정은 1980년대 다니엘 아랍 모이 대통령의 1당 통치에 맞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 반체제 인사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1982년 공군 장교들의 실패한 쿠데타 음모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약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겪기도 했습니다. 오랜 옥고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았던 그는 1992년 출소 후 지역구 야당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하며 케냐 민주화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5번의 대선 좌절과 정치적 폭력: 희비가 엇갈린 도전의 역사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의 정치 역정에서 대통령 선거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는 1997년을 시작으로 2007년, 2013년, 2017년, 2022년에 이르기까지 총 5차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낙선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특히 2007년 이후 4차례의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시위를 주도하면서 케냐를 심각한 정치적 폭력 사태에 빠뜨리는 등 격렬한 갈등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케냐 민주주의의 발전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딩가 전 총리는 정치적 명망가 출신으로서 줄곧 야권의 반체제 인사를 자처하며 케냐의 정치 개혁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1년 다당제 도입과 2010년 새 헌법 제정 등 케냐의 주요 민주화 개혁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케냐 총리를 역임하며 국정 운영의 경험을 쌓았으며, 최근까지도 아프리카연합(AU) 집행위원장에 도전하는 등 마지막까지 공적 활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총리에서 AU 집행위원장 도전까지: 멈추지 않은 도전과 야망
라일라 오딩가 전 총리의 생애는 케냐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정치적 격변기를 함께 했습니다. 5번의 대통령 선거 낙선이라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야권의 구심점으로 남아 케냐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총리직을 수행하며 국가 통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정계 은퇴 후에도 지난 2월 아프리카연합(AU) 집행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아프리카 전체를 무대로 활동하려는 강한 야망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이 선거에서는 지부티의 마흐무드 알리 유수프 외무장관에게 패배했지만, 이는 그의 마지막 공적 도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오딩가 전 총리의 서거는 케냐 정치계에 큰 공백을 남길 것으로 예상되며, 루토 대통령이 국장 엄수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한 것은 그가 케냐 국민에게 미친 영향력과 업적을 여야를 떠나 인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1973년 아내 이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던 오딩가 전 총리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케냐 민주화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