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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사의 연대를 앞당기다: 공주 교촌리 벽돌무덤, 4세기 말 이전 제작 확인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최근 광여기루미네선스(OSL) 연대 측정법을 통해 공주 교촌리 벽돌무덤의 벽돌이 4세기 말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밝혀냈다. 이는 무령왕릉보다 최소 100년 이상 앞선 시기로, 웅진 백제의 벽돌무덤 양식이 기존 학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80년 만에 재조명된 이 무덤은 백제 왕도의 규모와 초기 전축분 제작 기술 연구에 있어 핵심적인 고고학적 자료로 부상하고 있다.
1. 첨단 과학이 밝혀낸 진실: OSL 연대 측정의 성과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교촌리 벽돌무덤의 건립 시기가 현대 과학의 힘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토기나 벽돌 내 석영·장석이 빛에 노출되었을 때 발생하는 신호를 분석하는 광여기루미네선스(OSL) 기법을 동원했습니다. 분석 결과, 무덤을 구성하는 벽돌들은 4세기 말 이전에 이미 구워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기(475년) 이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 벽돌을 이용한 고분 축조 기술이 존재했거나, 혹은 천도 이전의 웅진 세력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암시하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2. 무령왕릉과의 차별성: 문양 없는 벽돌과 초기 제작 기법
백제 벽돌무덤의 정수로 불리는 무령왕릉과 비교했을 때, 교촌리 무덤은 뚜렷한 기술적 차이를 보입니다. 무령왕릉이 화려한 연꽃무늬 벽돌을 정교하게 사용한 반면, 교촌리 무덤은 문양이 없는 민무늬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무령왕릉의 벽돌이 고온에서 견고하게 제작된 것에 비해 교촌리의 벽돌은 상대적으로 저온에서 구워졌으며, 벽돌 사이를 채우는 재료로 강도가 높은 석회 대신 점토(줄눈)를 사용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소박하면서도 초기적인 형태는 벽돌무덤 기술의 도입 단계 혹은 초기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3. 일제강점기 미완의 조사에서 80년 만의 부활까지
교촌리 무덤의 역사는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인 학자 가루베 지온 등은 이 무덤을 조사한 뒤 구조적 특이성을 이유로 '미완성 고분'이라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8년 재발굴 조사를 통해 가로 3m, 세로 6.1m의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내부 구조가 다시금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80년의 긴 침묵을 깨고 이루어진 이번 연대 측정 결과는,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적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 고대사의 지평을 웅진 도읍기 이전으로 확장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4. 웅진 천도 이전의 백제: 왕도의 인식을 바꾸다
기존 학계는 백제의 벽돌무덤 기술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6세기 초 무령왕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로 인해 백제 웅진 시기의 역사적 시선은 100년 이상 앞당겨지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교촌리 무덤이 왕도 인근에 위치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천도 이전부터 공주 지역이 단순한 외곽 지역이 아닌, 고도의 건축 기술을 보유한 정치적 요충지였음을 시사합니다.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미정이지만, 당시 웅진 세력의 위상과 왕도의 범위를 재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5. 남겨진 과제: 무덤의 주인과 동아시아 기술 교류사
연대 측정으로 제작 시기는 특정되었으나,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는 많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곳을 '백제왕릉'이라 전하고 있는 만큼, 실제 피장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추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중국 남조와의 기술적 연관성을 넘어서 백제 고유의 전축분 제작 공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요구됩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이번 '2026년 춘계 지질과학기술 공동학술대회' 발표를 시작으로, 문헌사와 고고학, 그리고 지질과학을 융합한 다학제적 연구를 지속하여 백제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낼 계획입니다.